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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징검다리 인연으로 제주에 도착한, 점자 도서 이야기

아마 중2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을 ‘임시 체험’했던 시간이.


눈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감각에만 의존해 걸었던 5분은 다섯시간처럼 길었고, 우여곡절 끝에 천을 풀고 본 길들은 상상처럼 거칠지 않았다. 나무와 흙바닥, 돌… 그다지 낯설지 않은 눈앞의 상황은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구나. 시력마저 좋아 ‘소머즈’로 불리던 아이는 그 찰나의 감각이 이후로도 내내 잊히지 않았다.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되면 읽을 수 없는 사람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말풍선이 마음 한 켠에서 툭 떨어졌다.

 

시간이 오래 지나 나는 캐나다로 이민을 다녀왔고 책을 3권 쓴 작가가 됐다.

 
그 와중에도 촉각 도서나 점자 도서에 관심을 내내 가지고 있었지만, 별다른 접점은 없었다.


상담하고 글을 쓰면서 항상 동경해 왔던 이근후 선생님께 멘토가 돼 달라고 요청해 좋은 관계가 됐다.

 

그 와중에 한국에 와서 선생님을 뵙고 대화하는 중에 정말 놀랄 일을 만났다. 아니, 놀랄 책을 만났다.


종로에 있는 선생님의 <가족 아카데미아> 사무실에 국어 대사전 사이즈 3권 분량의 하얀 도트 무늬책이 있었다. 그것도 무려 선생님 신간으로 나온 점자 도서가!


그 사연인 즉 이러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코끼리 만지는 인생>이란 책을 인디북스 출판사를 통해 출간했는데, 이 출판사의 대표가 선생님의 예전 환자라는 것이다. 이분이 선생님께 진료받은 지 어언 20여 년이 지나 회복과 글 쓰는 과정을 거쳐 출판사를 열게 된 것. 당사자의 표현대로 ‘참으로 귀하고 드문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이근후 선생님은 본인 눈이 어두움으로 고생하시면서 시각 장애인을 위한 점자책에 관심을 가지셨다고 한다. 이를 알고 ‘과연 선생님답다’며 점자책 30권을 기획 출간한 인디북스 최다경 대표의 마음이 저서 마지막에 고스란히 젖어 있다.


 

선생님께 직접 책을 받아 서귀포 점자 도서관에 기증하고 선생님께 보고 메일을 보냈더니 선생님은 다음 숙제를 주셨다. 지역 신문에 칼럼을 하나 쓰라고. 신간 읽기 어려운 것이 점자책인데, 몰라서 못 읽는 사람이 많지 않겠냐…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점자책과 좋은 인연 갖기를 원하셨다.

 

 

글을 쓰다 말고 달력을 보니 4월 20일이 장애인의 날이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인데... 어떻게 캐나다에서부터 시작된 선생님과의 인연이 제주도에 점자 도서 기증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 혹시 이 책을 점자로 읽어야 할 사람이 서귀포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재미있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참고로 나는 출판사 대표님을 모른다. 서귀포 점자 도서관장님도 몰랐다. 그런데도 이근후 선생님의 마음과 저서, 출판사 대표님의 정성을 통해 ‘연결자’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고, 본의 아니게 나의 오랜 소원(!)도 이뤘다. 


점자 도서관 및 도서 상황이 열악하고 인식 개선도 필요한 시점이다. 선생님의 숙제로 쓴 이 글이, 모쪼록 점자 도서를 많이 접하고 읽힐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제주교통복지신문, TW News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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